[歷知社知 10] “승자의 유전자를 가져라” 일본, 서양을 번역해 근대를 이식하다

1863년. 1854년 미국 페리함대에 의해 강제개방이 된 일본은 여전히 긴가민가하고 있었다. 

서양을 배척할 것인가 수용할 것인가, 아니면 수용하는 척만 할 것인가. 중국에서는 이미 일이 벌어져 있었다. 1840년과 1856년 두 차례의 아편전쟁을 거쳐 청나라는 영국에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일본은 아직 평화로웠다. 요코하마항에 외국인들이 들어와 차츰차츰 세력을 늘려 나가고 있었지만 아직 이렇다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슬금슬금 커지는 불안감 탓에 존왕양이(尊王攘夷)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지만, 에도 막부의 태도 자체가 뜨뜨미지근했다. 말로는 외세 대항이었지만 들어온 외세를 실력으로 내몰 자신은 전혀 없었다.

1615년 오사카성 전투에 패해 일본 열도 구석에 몇 백 년을 웅크리고 있었던 조슈와 사쓰마번의 무사들 사이에 반(反)막부 분위기가 달아 올랐다.

그러던 어느 8월의 여름 날. 한 무리 영국 관광객들이 사쓰마 번주의 아버지 시마즈 히사미츠의 행렬을 가로 막았다. 정확히 말하면 가로막았다기보다는 홍콩으로 돌아가기 전 요코하마 근처 몇 군데 둘러보려던 길에 마주친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이 영국인들은 그 날 정말 운이 없었다. ‘비키라’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당황한 나머지 말을 잘못 다뤘고 그만 행렬 한 가운데로 파고 들고 말았다. 

지시를 무시하고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권력자의 행차를 방해하는 외국인들에게 호위 사무라이들은 분노했다. 칼을 빼 들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영국인 4명 중 1명이 10군데 이상을 난자당한 끝에 살해됐고 2명은 중상을 입었다. 더구나 일행 중 한 명은 여자였다.

“본때를 보여 주자.” 다음 해 7월, 영국 함대가 가고시마항에 정박해 있던 사쓰마의 기함 3척을 나포해 버렸다. 사쓰마 쪽의 사죄와 배상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사쓰마는 화를 참지 못했다. 겁도 없이 육상 포 80여 문으로 영국 함대에 선제 포격을 가했다. 불의의 습격이었다. 

‘전투 할 일이야 있겠냐’며 나포한 배와 함께 바다 위에 떠 있던 영국은 기함 한 척이 대파되고, 두 척이 중파, 기함 함장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말로 끝내려 했는데 그만 전쟁이 돼 버렸다. 정색을 한 영국 함대의 집중 포격이 시작됐다. 

대들었던 사쓰마에 곧 결과서가 날아 들었다. 사쓰마 육상 포대 전체가 전멸하고, 가고시마 전체가 불바다가 되고 말았다. 사쓰마와 영국 간의 전쟁, 사쓰에이전쟁(薩英戦争)이었다.

비슷한 시기 사쓰마와 가까운 조슈번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사쓰마의 사건은 우연이었지만, 이번엔 에도 막부의 직접 지시가 원인이었다. “양이에 나서라.”

결기 하나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조슈번이 과감히 실력행사에 나섰다. 1863년 5월 조슈는 해협을 통과하던 서양 상선에 아무런 사전 경고도 없이 포탄을 날려 버렸다. 

기분이야 좋았겠지만 이 실력행사로 인한 결과는 엄청났다. 사건 한 달 후인 6월 미국 프랑스가 조슈해군을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힌 데 이어 다음 해 1864년에는 영국 미국 네덜란드 프랑스 등 4개국 함대 17척으로 구성된 연합함대가 조슈를 맹폭했다.

조슈 해안포대가 전멸했고, 상륙한 해병대에 의해 시가지까지 파괴됐다. 이른 바 시모노세키 전쟁(下関戦争)이었다.

우리가 언제 싸우긴 했을까?

사쓰에이, 시모노세키 2개의 전쟁은 국가 간 전면전은 아니었지만 이 두 전투의 영향은 컸다. 무엇보다 존왕양이 강경파였던 사쓰마와 조슈의 태도가 돌변했다. 직접 전쟁을 벌이고 당하고 하다 보니 깨달음이 온 것이었다. 

존왕은 하고 싶지만 그것과 동시에 양이를 한다거나 더구나 양이를 통해 존왕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함이 확실해졌다. 서양의 군사력은 데지마 작은 상관에서 네덜란드와의 제한된 교역을 통해 확보해 놓은 대포 몇 문으로 대항하고 물리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일본은 패배가 확정되면 자신을 짓밟은 승자를 스승으로 모시는 데 소질이 있다. 2차대전 후에도 그랬지만, 이 때도 일본은 대항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학습 모드로 돌변했다. 

나를 이토록 처참히 누를 수 있는 당신들은 누구인가? 당신들은 어떤 힘이 있어 이토록 강한가? 당신들의 힘의 원천은 무엇인가? 강화조약이 마무리되자 일본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나타나거나 만들어지고, 이들을 새로운 스승에게 보내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어제까지 용감하게 포를 쏘아 대던 사쓰마가 영국과의 평화협상 중 제안을 하나 내밀었다. “우리 인재들을 당신네 나라에게 유학을 보내고 싶다.” 갑자기 어제의 적으로부터 “배우겠다”는 얘길 들은 영국은 처음엔 황당해 했지만 워낙 감동스런 태도에 곧 손을 잡아 주었다. 

1865년 3월 시찰원 4명과 유학생 15명이 영국으로 떠났고 유니버시티컬리지런던(UCL)에서 청강을 시작했다. 조슈는 좀 더 빨랐다. 이미 1863년 5명 젊은이가 번주의 묵인 아래 영국으로 밀항 유학했다. 알고 보니 이들은 이미 UCL에서 공부 중이었다.

공식 채널도 움직였다. 1860년에는 후쿠자와 유키치(개인이 깨어 나야 국가가 발전한다고 역설한 일본 계몽 사상가. ‘서양사정’ ‘학문의 권장’ 등의 저서를 집필해 일본 사회 분위기를 근대화로 이끌었다고 평가된다. 조선 개화파 김옥균 등의 사상적 지원자였으나 개화파가 몰락하자 조선을 멸망시켜야 한다는 주장으로 급변했다)가 에도 막부 특사의 일원으로 미국을 방문했으며 1862년에는 유럽을 1년간, 1867년에는 다시 반 년간 미국을 방문했다. 

1862년 니시 아마네(철학, 인문학, 예술 분야 서구 개념을 일본으로 소개한 당대 최고의 일본 지성)가 막부의 명령을 받고 네덜란드로 유학했고, 1865년에는 모리 아리노리(초대 주미공사, 초대 일본 문부성 대신)가 영국으로 유학했다. 서양에 유학하고 돌아온 일본인은 메이지 유신(1868년) 이전에 160여 명에 달했고, 1890년경까지 3천 명을 넘었다.

근대의 언어를 배워, 근대를 만들어 내다

이들의 유학기간이 절대적으로 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서양 땅에 가서 온전히 그들의 언와와 문화에 전면적으로 노출되었던 경험은 강력했다.

그들은 일본 땅에 앉아서 간혹 찾아 오는 서양인들이나 그보다 더 드물게 바다 건너 중국에서 흘러 들어오는 얘기 듣는 게 다였던 일본인들이 2백년 세월이 지나도록 이해할 수 없었던 서구의 개념을 알아 들을 수 있는 말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메이지유신 후 6년째 되던 1873년 미국에서 돌아온 모리 아리노리가 주도해 만든 민간 학술단체 메이로쿠샤(明六社, 메이지6년째 되는 해에 결성했다고 하여 만든 이름으로 전해진다)가 남긴 기록은 서양 문명 통역자이고 번역자로 활동했던 이들의 역할을 잘 보여 준다. 

10∼14명으로 구성된 메이로쿠샤는 한 달에 두 번 모여 토론하고 그 결과를 작은 출판물로 배포했다. 토론 범위는 철학, 종교, 문자, 사회문제, 화폐·무역, 남녀평등 등 광범위했다. 일본 사회가 몰랐던 주제였고 사용되는 단어는 새로웠다. 총 25호에 걸쳐 찍은 10만여 부 중 8만 부 가량이 판매됐다. 

당시 일본 전체 인구가 3천여만 명에 불과했고 이 정도를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수는 더욱 제한적이었을 것임을 감안하면 그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메이로쿠샤 독자들은 잡지를 읽으며 유럽을 배워 나갔다.

정부의 노력도 적극적이었다. 메이지 정부는 1855년 에도 막부 말기 외국문헌 연구 및 교육기관으로 설립되었던 양학소(洋學所, 뒤에 번서조소(蕃書調所)로 개칭됐으며, 동경제대로 발전해 나간다)를 이어받아 1870년 개성학교(開成學校)를 설립하는 등 연구 노력을 이어 가는 한편 정부 차원의 번역 업무를 주도할 기관으로 번역국을 설치해 서양 문헌 번역을 촉진했다. 

서구 제국 국력의 원천을 파악하기 위한 역사책이 중점 번역됐다. 버클(Henry T. Buckle)의 ‘영국개화사’가 1875년 번역됐고, 1879년에는 프랑수아 기조(Francois Guizot)의 ‘유럽문명사’가 출간됐다. 메이지 원년 1868부터 1882년까지 15년간 일본인들이 번역한 서양 서적은 1410종에 달했다.

번역된 서양 문헌을 통해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전혀 접해 보지 못했던 르네상스 이후 축적된 서양 근대 문명 5백년의 비밀을 배웠다. individual, freedom,  love, citizen, society, science, arts. inductive, deductive, contract, evolution.

특히 당시 일본인들은 individual과 society 그리고 citizen, democracy란 개념을 어려워했다. 천황과 영주 아래 수직관계 속 신민 밖에 없었던 일본인들에게 자유로운 개인과 개인들의 관계를 통해 존재하는 사회란 상상 범위 밖의 개념이었다.

처음 individual은 홀로 존재한다는 존재의 단독성으로 이해하고 ‘일개 개인’으로 번역되는 것이 고작이었고, society는 번역이 불가능하다고 포기할 뻔했다. democracy는 시민이 주인이 된다고 하니 ‘하극상’이었다.

하지만 원어 그대로의 어감은 아니라 하더라도 일본 세상으로 들어 온 서양의 개념어들은 차츰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고, 결국 individual은 개인으로, society는 사회로, citizen은 시민으로, science는 과학으로 자리 잡았다. 

freedom의 번역어로 사용된 자유는 원래 중국 고전에서 자기 마음대로 행동해 폐를 끼치는 어감에 가까웠지만 곧 간섭 받지 않는 개인의 권리로 이해되었다. 문학에서도 ‘I love you’는 처음에는 ‘죽어도 좋다’는 너무 비장한 일본말로 번역됐지만 1890년대 정도에서는 ‘愛’ 라는 달달한 말로 자리잡았다.

모든 번역이 동일한 품질을 냈던 것은 아니며, 모두 훌륭했던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원본과 거의 똑같이 복제하는 데 성공한 것도 있지만, 원래 있던 일본에 붙여 넣는 과정에서 왜곡된 것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은 메이지 시대 계몽기를 거치며 무려 1만4846개의 단어, 특히 추상적 개념어를 사전에 추가하면서 서양이 만들어 놓은 근대를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삼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할 수 있었다. 

일본에 개인은 없었지만 개인이란 말이 생기면서 개인이 등장했고, 역시 없었던 사회도 사회란 말을 통해 이해되고 만들어졌다. 일본은 서구를 따라가 위해 꼭 있어야 했던 현실을 번역된 말로 거꾸로 만들어 냈다.

위험한 승리, 정신승리

일본이 번역으로 만든 근대는 그들이 성취한 물질적 군사적 성취에 힘입어 동아시아 전체를 적셔 나갔다. 1876년 개항 이래 공식적으로만도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70년, 그리고 그 영향 하 오늘까지를 합하면 150여 년 간 일본의 영향력 아래 있다고 평가되는 한국은 물론이려니와 한자의 본고장 중국조차도 일본이 이해한 근대 아래에서 현대 중국의 기초를 닦았다. 

1896년부터 1911년 사이 900여 권의 일본 책이 중국어로 번역됐고 1905년과 1906년에 일본에 유학한 중국인 학생은 8천 명이 넘었다. 그 들 가운데 뒷날 중국 사회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손문(孫文) 노신(魯迅) 주작인(周作人) 곽말약(郭末若) 왕국유(王國維) 등이 있었다. 한자를 매개로 한 언어 주도권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이동한 것이다.

전투든 사업이든 실패는 힘들다. 많은 인력과 자원을 투입하고, 열정 노력에 희망까지 녹였는데 기대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허탈함이 크다. 큰 헛스윙은 몸을 상하게 한다. 상대가 있는 실패, 패배는 더 뼈아프다. 실패는 나 혼자 끙끙 앓으며 넘길 수도 있지만 패배는 상대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패는 묻어둘 수 있을 수도 있지만 패배는 감출 수도 없다. 승자는 자랑하고 다니기 마련이고 승자는 홀로 무대의 주인공이 된다. 한 때 승자와 겨뤘던 추억만으로 이를 참아내기는 너무 어렵다.

정신승리는 그래서 등장한다. 이길 수도 있었다. 잠시 실패했을 뿐이다, 다시 일어서면 그만이다. 이번 실패는 큰 의미 없다, 저들이 운이 좋았을 뿐이다. 애초 의미를 크게 뒀던 사업은 아니다. 비록 작지만 우리 사업이 더 의미가 있다. 저들이 시장을 차지 헸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고객은 우리를 더 좋아한다.

억지로 하는 정신승리는 배움의 기회를 막고, 성공을 만들어 내는 학습을 차단한다. 아편전쟁 후 청나라가 그랬다. ‘우리가 진 것은 맞지만 매우 작은 전투였을 뿐이다. 땅 조금 떼어 줘 봐야 표도 안 난다. 중국은 큰 나라다.’ 청나라는 패배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종전 후 베이징을 찾은 영국 사절에게 황제 앞 삼궤구고두례를 또 요구했다. 자존심이 우선이었다.

일본은 반대였다. 결과는 아무튼 패배였지만 사쓰에이 전쟁이나 시모노세키 전쟁은 사실 일방적으로 당했다고 얘기할 것까지는 없는 전쟁이었다. 가만히 있다가 끌려 나와 싸우다가 억울하게 얻어맞기까지 한 것이 절대 아니었다. 

싸움을 먼저 건 쪽은 일본이었으며 준비가 없었던 상대를 대상으로 초반 승리도 있었다. 이길 뻔한 전쟁, 이길 수도 있었던 아쉬운 전투 등 피해 나갈 구석은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크게 졌다”고 바로 말했고 “우리는 너무 부족했고 그들은 너무 강했다”고 위기 의식 속으로 자신을 몰아넣었다. 그리고 자신을 처참하게 무너뜨린 그들을 끔찍하게도 닮고 싶어했다. 

승리를 만들어 내는 유전자를 가질 수만 있다면 언젠가 나도 저들을 이길 수 있을 테니까. 결과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다.